2020. 6. 25. 18:43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농부셨다. 체구도 작고 깡 말랐으며, 드러나는 모든 부분이 까무잡잡한 농부. 어렸을 때 나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라면 모두 농부인 줄 알았다. 초등학생 때 여름방학 동안 할머니를 뵈러 바로 옆 동네에 다녀왔다는 친구의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거기에도 논밭이 있냐는 나의 질문에 친구는 ‘없다’고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충격. 그럼 농사는 어디에서 지으시냐고 했더니 이번엔 친구가 충격을 받았다. “너희 할머니는 농사지어?” 내가 자랑스럽게 ‘응!’ 하고 대답하자 친구가 눈을 반짝이며 그럼 밀짚모자도 쓰시냐고 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는 마트에서 파는 쌀 포대에 그려진 밀짚모자를 쓴 농부를 떠올린 듯싶다.
시골도, 농부도 모두 낯설어하는 친구에게 경운기와 고추를 말리는 커다란 창고, 그리고 물을 퍼 올리는 개울가까지 열심히 설명해줬던 나는 그날 집으로 가서 엄마에게 그 친구 참 안됐다는 말투로 대화를 전했다. 그러나 엄마의 반응은 내 예상 밖이었다. 엄마는 한숨을 폭 내쉬며 “농사짓는 게 좋은 건 아니지. 할머니 할아버지도 쉬시면 좋으련만”이라며 그때는 이해하지 못할 말을 했다.
그래도 나는 여름 방학이 되면 시골로 놀러 가는 게 참 재미있었다. 시골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거나 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개울가에서 뒷목이 새카맣게 타도록 다슬기를 잡았고, 점심을 먹은 뒤엔 어른들을 따라 밭에 나갔다. 곳곳을 쏘다니며 벌집을 구경하기도 하고 근처 약수터까지 걸어가 물을 떠먹고 오기도 했다.
그곳은 정말 시골이라 동갑내기는 없었지만 재빠른 내 뒤를 느릿하게 따라오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항상 있었다. 언제는 밤에 몰래 산책하러 나갔다가 마을에 있는 무덤 앞에 빨간 꽃다발이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곧바로 야행을 접고 집으로 돌아가 어른들에게 말하니 아무도 믿지 않았고, 결국 내 손에 이끌려 나온 친구는 할아버지뿐이었다. 그런데 길어야 30분도 안 흘렀을 그 시간 사이에 빨간 꽃다발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괜히 덜컥 겁을 먹은 나는 비 맞은 다람쥐처럼 오들오들 떨어 댔는데,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달래며 집까지 업고 느릿느릿 돌아왔다. 괜찮다, 고마 괜찮다, 네가 순수해서 무덤 주인의 마음을 본 모양이라고, 괜찮다고…,
내 어린 시절을 반짝이는 것들로 채워준 시골, 그리고 그 시골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계절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그건 두 분이 계절을 이끌어 나가는 생명을 짓는 농부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름에는 작고 까무잡잡하지만 용맹한 군인 같았고, 가을을 맞이할 때면 1년을 공들인 농작물을 지키기 위해 더욱 열을 올렸다. 일찍 수확을 마친 옥수수를 잊지 않고 서울로 보내 주시며 가끔 승전보를 알려왔다. 그렇게 치열한 여름과 가을을 보낸 두 분은 겨울에는 우리집에서 몇 주 쉬고 가셨는데, 까맣게 타오른 얼굴은 쉬시는 내내 좀처럼 하얗게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집으로 찾아온 고모들을 포함한 모든 ‘어른’들이 이제 다음 해에는 농사를 줄이라고, 줄이라고 열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적어도 어린 내 눈에는 그리 보였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시골에서 가방 가득히 가지고 오신 밤은 겨울 내내 내가 굴러다니면서 까먹는 간식이었는데, 나는 그 밤을 포동포동해질 때까지 까먹으며 그저 두 농부가 지키는 모든 것들이 좋다고 생각했다. 서울의 수박은 시원했으나, 여름에 시골로 찾아가 막 따먹는 수박은 따뜻했다. 서울의 가을은 뭐가 그리 급한지 이제 곧 연말이라며 서두르기만 했으나 시골의 가을은 느긋하게 노랗게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겨울. 잠시 논과 밭을 포근하게 잠재운 군인들은 몇 주간의 휴식을 끝으로 다시 돌아갔다. 다시 찾아오는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고등학생이 됐을 때의 나는 제법 ‘어른’ 흉내를 내며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이제 농사를 줄이시라고 말하는 단계까지 오게 되었다. 그래도 묵묵히 농사를 짓는 두 분을 보면서 나는 참 꼬장꼬장하시다는 생각까지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정말 ‘어른’ 딱지를 달 수 있는 대학생이 됐다.
세월은 나에게만 흐른 것이 아니기에 용맹한 전투를 벌여온 두 군인 역시 노쇠해졌다. 이제는 누가 말리지 않아도 힘에 부쳐 농사를 서서히 접어가고 있었고, 그렇게 계절을 지키는 분들이 힘을 잃자 나는 봄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가오는 개강과 그에 맞춰서 짜야 할 학점 계획들, 그리고 봄옷을 굳이 사야 하는지와 같은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면서 흐릿한 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맘때 버티고 버티시던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건강 문제로 서울에 올라오셨고, 나는 두 분이 떠난 시골집을 정리하기 위해 어른들과 함께 시골로 내려갔다.
나도 나름 ‘어른’이어서 차로 내려가는 내내 ‘그러게 진작에 접고 올라 오셨어야 했다’, ‘아버지가 보통 고집이냐’, ‘무리하셨다’는 대화들을 알아듣고 그럭저럭 참여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시골집에 도착했을 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어릴 적 어른들과 함께 밭에 갔을 때 깍두기가 되었던 모양새로, ‘어른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시골집 안을 빙빙 돌았다. 낡은 서랍을 뒤적이다 할아버지의 필체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수첩을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아빠에게 수첩을 보여 주자 그건 그냥 거기에 두라고 했다. 아빠는 병원에 입원하실 분들의 옷가지와 실용적인 물품을 챙기느라 바쁜 탓이었다.
그 수첩은 봄 수첩이었는데, 할아버지가 매년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품종들을 정리한 기록이었다. 고추 품종부터 벼 품종, 그리고 필요한 비료들이 수첩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매년 숫자는 줄거나 늘었으나 그 폭은 크지 않았다. 문득 중학생 시절 할아버지에게 농사가 지겹지 않냐고 물었던 기억이 났다. 할아버지는 그저 ‘농사꾼은 농사를 지어야 하는기지.’ 라고 답하셨고, 내가 그래도 너무 힘들지 않냐고 묻자 ‘하늘에 맡기는 일이라 제일 편타.’ 라며 웃으셨다. 애매하게 나이를 먹어가던 내가 ‘어른’ 흉내를 내며 태풍 와도 힘들고, 폭염이 와도 힘들고, 막상 농사가 잘되어도 모두 다 잘돼서 가격 떨어지면 실망스럽지 않냐고 중얼대자 할아버지는 ‘그라믄 다시 하면 되제. 올해 힘들면 내년에 잘 될 것이고, 내년이 힘들면 그 후년은 좀 낫것제.’ 라고 웃으며 잘 깎은 생밤을 쥐여 주셨었다. 그게 이런 의미였구나. 묵묵하게 할아버지의 봄 계획을 받아 낸 손바닥만 한 수첩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수첩을 서랍 안에 두지 않고 내 가방 안에 넣었다. 봄의 가치를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그 후로도 나는 가끔 봄이 무디게 느껴지고, 여름이 지루하게 느껴지고, 그리고 가을이 그저 연말을 기다리는 애매한 순간으로 여겨진다거나, 겨울이 무심한 마침표로 느껴지면 수첩을 꺼내서 읽어 본다. 계절을 지키는 자들의 치열한 열기가 담겨 있는 듯해 보고 있으면 끊임없이 돌고 도는 이 순간들이 살아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바라봤던 ‘어른’이 되면서 그 과정 속 스스로를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내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너무나도 많음을 알게 되었다. 거창한 시련이 없더라도 손끝을 찌르는 작은 가시마저도 한없이 아프게 느껴진다는 것 역시. 하지만 내가 봐도 이 아픔을 남에게 울부짖기에는 사소한 일인 것 같아 그저 속으로 잘게 씹어 삼키는 순간들이 오면 가만히 눈을 감고 봄이 담긴 수첩을 생각한다. 다시, 하면 된다. 다시 하면, 된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이번이 엉망이더라도 다시.
계절을 지키는 군인들은 명예로운 은퇴를 했고 나는 그분들이 남긴 가치를, 변치 않는 봄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괴로운 과정 속에서는 끝을 바라고, 막상 끝이 닥치면 다시 시작하고 싶어 손을 털고 일어나는 아이러니와 함께 하는 것이 ‘어른’에서 어른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계절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 보려고 한다. 내가 그날 잠들어 있는 시골집, 낡은 서랍 속에서 가지고 온 봄의 가치와 함께.
*본 게시물은 2020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수상작으로 상업적 용도의 사용, 무단전제, 불법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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